142, 경험

입대한지 어느덧 500일에 다 되어갑니다. 전역까지는 140여일이 남았네요.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많이 남은 것만 같습니다.

군대는 뺄 수 있으면 빼는 것이 좋다지만, 저는 약 500일 간의 군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군인이라는 이유로 답답하고 불편한 점도 몇 있습니다. 그래도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덕인지, 현재 처한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도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군대에 가서 많은 것을 이루고 오리라는 다짐을 하고 입대하곤 합니다. 저도 그 사람 중 한 명이었죠. 자격증 취득이나, 수능 응시 등의 거사는 아니었습니다. 군입대 전 관심있던 분야에 대해 심도있게 공부하고, 전역 후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 명확한 길을 찾고 나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계획은 대실패였습니다. 방황했던 시간이 길었고, 명확한 해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전역을 7개월 정도 앞둔 병장이 되어서야 어느정도 갈피를 잡고 늦게나마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군생활 동안 고민하고 방황하며 부딪혔던 모든 경험들이 꽤 쓸모있는 자산이 된 것 같습니다.

2024년 4월에 진주의 공군 교육사령부로 입대해, 6월 충청남도 계룡시에 위치한 공군본부로 배속되고, 공군 지능정보체계관리단 RPA개발팀에서 군생활을 하며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기록해봅니다.

경험

사투리가 정말 심한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분명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이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말 그대로 사투리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공군 지능정보체계관리단의 AI신기술체계개발대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군 내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부대입니다. 전산 특기로 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개발부대이기에, 능력좋은 20대 컴퓨터공학과 학생들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능력이 좋다는 것은 개발을 잘한다는 의미입니다. 애석하게도 저는 능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운이 좋게도 면접에 붙어 군 내의 자동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RPA개발팀에 배속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빨리 배우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적응하는 것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지만, 주위 선후임 병사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는 것과 들어본 것보다, 모르는 것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를 기준으로 불과 1년 전 즈음까지만 해도 저는 코딩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학생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정치와 법과 경제 과목을 가장 좋아했고, 수능 수학(나)형을 응시한 문과 출신이었으니까요.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해 1학년 때 전공 선택을 위해 다양한 학문을 경함하고, 논리학과 뇌과학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컴퓨터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했습니다. 그후 1년 동안은 컴퓨터학과 학생들을 따라가기만 하자는 생각으로 수업만 열심히 들었습니다. 적성에도 잘 맞고, 열심히 한 덕에 성적은 잘 맞았으나 제대로된 프로그램을 개발해본 경험은 전무했습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나 프레임워크에 대해서 지식이 짧은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습니다.

입대 전 마지막 학기 때 들었던 프로그래밍 언어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 교수님께 연락드려 연구실 인턴 생활을 했었습니다. 짧디 짧은 3개월 동안의 경험이었지만, 교수님과 연구실 선배님들의 애정어린 지도와 관심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APR(Automatic Program Repair)과 정적 분석을 주제로 조금이나마 깊게 탐구했었는데, 너무나도 재미있는 주제였고, 연구실 인턴 생활이 즐거웠거운 경험이었기에 전역 후 대학원에 가야겠다는 부푼 생각과 함께 2023년 4월 공군 훈련소에 입대하였습니다.

입대 전 끝의 경험이 연구실 생활이었기 때문인지, 연구실 생활이 적성에 맞았기 때문인지 군에서도 관련된 분야의 연구를 계속하고자 생각했었습니다. 여차하면 안에서 논문 한 편을 써오자 생각할 정도였죠. 하지만 이는 엄청난 오만이었습니다. 연구실 내에서 선배의 연구를 따라가며 공부를 했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만의 주제를 선정하여 이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연구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큰 난관이었습니다.

많은 시간 고민했고 고뇌했습니다. 연구 주제를 정하기엔 아는 게 많지 않은 것 같아 논문이나 책을 읽다가도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멈칫했습니다. 그러다가도 또 고민의 답이 나오지 않아 공부하고, 그만두길 반복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명확한 해답은 없이 시간만 흘려보냈던 것 같네요.

널린 게 컴퓨터공학과 학생들인데, 조언을 구할 수는 없었을까요? 생각보다 조언을 구할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신기하게도,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학교 수업을 듣고 공부만 하고, 짧지만 연구실 생활을 하다 온 입장에서는 다소 놀라운 광경이었죠. 아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도 너무나도 달랐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컴퓨터공학도로서 연구로의 길과 개발로의 길이 생각보다 많이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을 체감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체계적인 개발과 업무 경험을 군대서 처음 해보았습니다. 아직 개발이라는 언어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본인이 하면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알았기에, 또 새로운 경험이라는 것이 재미있었기에 공부하고, 경험했습니다. 개발을 하는 엔지니어, 개발자로서의 삶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들게 해주었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결국에는 너무나도 짧았던 경험이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고, 많은 경험이 쌓이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구의 주제를 쉽사리 정하지 못한 것도, 결국엔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경험하고 그 경험에서 떠오르는 궁금증과 탐구심이 자연스레 연구로 이어지는 모습이 이상적이었습니다. 저 또한 더 폭넓은 경험을 했다면 연구하고픈 주제가 당연하게도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추후에 다시 대학원 진학에 생각을 두더라도 당장은 많은 경험을 하는 것에 집중해야겠습니다. 전역 후 사회에서 할 양질의 경험들이 훗날 더 나은 선택과 넓은 시야를 가져도 줄 것을 뼈저리게 알았으니까요. 최근에는 수많은 개발을 하며 개발과 연구가 그리 다른 길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아직은 5년 후의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막연하게 스타트업을 해보고 싶다, 특정 분야에 대해서 깊게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어도 어떤 아이템과 기술로 스타트업에 도전해볼지, 어떤 분야에 20대를 바칠 만큼의 흥미가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여러 분야에 시선을 두고 폭넓은 경험을 닥치는대로 해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웬만한 사투리는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까지는 경험을 쌓으려고 합니다. 어떤 지역 사람과 가장 죽이 잘 맞는지는 그 이후에 판단할 일이겠죠.